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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버트 그레이프는 한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가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자동차도 있고, 버스도 있지만 이상하게 가장 자주 떠오르는 이동 수단은 자전거다. 주인공 길버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늘 같은 반경 안에서만 움직인다. 자전거는 그 사실을 가장 조용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이 영화에서 자전거는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테두리를 나타낸다.

    영화의 줄거리, 떠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

    길버트 그레이프는 아이오와의 작은 마을 엔도라에서 살아간다. 그는 지적 장애가 있는 동생 아니와 비만으로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어머니, 그리고 다른 형제들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진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길버트는 가장이자 보호자 역할을 떠안고 있다. 그는 마을의 식료품점에서 일하며 하루를 반복한다.

    영화는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간다. 길버트는 어머니를 돌보고, 동생의 생일을 준비하고, 마을에 잠시 들른 여행자 베키를 만난다. 베키는 길버트에게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길버트는 떠날 수 있지만, 떠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 선택을 비난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왜 멈춰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자전거가 보여주는 삶의 거리감

    길버트가 타는 자전거는 특별하지 않다. 빠르지도 않고, 새것도 아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오가지만, 그 이동은 언제나 짧다. 집과 일터, 그리고 익숙한 길뿐이다. 이 자전거는 어릴 적의 자유를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 떠나지 못한 상태를 드러낸다.

    자전거를 오래 타본 사람이라면 이 감각을 이해할 수 있다. 분명 움직이고 있는데,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도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들이 불편했다. 솔직히 효과 없었다고 느낄 만큼 답답했다. 자전거를 타고 있지만, 삶은 그대로인 상태. 이건 직접 해보면 안다.

    떠날 수 있는데 떠나지 않는 선택

    길버트는 떠날 기회를 여러 번 마주한다. 베키와 함께 떠날 수도 있고, 가족을 두고 다른 도시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늘 멈춘다. 이 선택은 겁 때문만은 아니다. 책임과 애정, 그리고 익숙함이 뒤섞인 결과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불쌍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한 번쯤은 서 있었던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그래서 나는 이건 안 한다”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길버트의 삶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방식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지나니 포기했다는 감정과는 다르다. 이건 오래 못 갔다라는 느낌에 가깝다. 멈춰 있는 삶이 얼마나 사람을 갉아먹는지 조용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상징이 될 때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자전거는 상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설명도 없고, 강조도 없다. 하지만 자전거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까지가 전부다’라는 암묵적인 경계 말이다. 자전거는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결정된다.

    아마 여기서 막힐 거다. 이 영화가 왜 자전거 영화로 분류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자전거만큼 이 영화의 정서를 정확하게 담아내는 도구도 없었다. 자동차였다면 너무 빠르고, 걷기였다면 너무 정체됐을 것이다. 자전거는 그 중간에서 길버트의 상태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준다.

    다시 봤을 때 더 아픈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나이가 들수록 더 아프게 다가오는 영화다. 젊을 때는 답답함이 먼저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가 먼저 온다. 왜 떠나지 못했는지, 왜 머물렀는지, 그리고 왜 그 선택이 쉬운 게 아니었는지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반복해서 오가는 장면들은, 시간이 쌓일수록 더 무겁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 영화는 추억 때문에 다시 보게 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보게 된다. 자전거를 타며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나”를 스스로에게 묻게 만드는 영화다. 이건 설명으로 전달되는 감정이 아니다. 직접 느껴야 한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자전거를 멋있게 쓰지 않는다. 하지만 자전거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 그리고 인생의 반경을 고민해본 사람에게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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